마이너 장르에 있기 아깝다 여겨질 정도로 내가 읽었던 동양물 중에 최고임. 시대물 벨이나 로설 볼 때 다른 건 차치하고 고증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그냥 술술 읽힘. 벨 요소 제외하고 봐도 너무 잘 쓴 소설.
내가 동양물 중 최고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야기 내내 수가 거의 궁 안에서만 지내기 때문에 결국 스토리가 원사이드해질 수밖에 없는데, 작가님이 타국(들)과 엮이게 만들면서 그 이야기를 같이 풀어가신다... 대하드라마처럼 등장인물이 우수수 나오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버릴 캐릭터가 한 명도 없다. 작위적이지 않게 물 흐르듯이 캐릭터마다 서사가 부여됐다는 점이 놀라움.
제목이 경국지색이어서 나는 수가 존나 미인수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음. 정갈한 외모에 장군답게 다부진 피지컬... 오히려 이득이죠? 아무튼 읽을 땐 딱히 제목을 의식 안 했는데 불현듯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... 경국지색이 별게 경국지색이 아니라는 거... 제목도 너무 잘 지으셨음.
위천은 황제가 될 수밖에 없는 성정을 타고난 사람인데, 오로지 현에게만 아주 제대로 된 다정공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. 물론 극한의 다정함이 관계의 모순을 상쇄시켜주진 않는다. 위천의 현을 향한 마음은 참 지극히도 이율배반적'이었다'고 생각한다. 이 양반이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...
등장인물 A, B, C의 각 외전으로 마무리되는데 A부터 헛헛한 마음으로 봤다. C 외전은 1페이지조차 채 안 되는 분량인데 다 보고 닫을 수가 없었다고... 외전 보고 운 작품은 이게 처음이라고...ㅠㅠ
자국에 모든 걸 맹세하고 바치는 현이 결말에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음... 그 선택의 기저에 깔린 마음은 어디서 기인한 건지.
1. 자국에서 장군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임무를 준다. 현은 이 임무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 했다.
2. 훗날 자국에서 현을 자국으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이미 그는 스스로가 무쓸모가 되었다고 생각한 때.
3. 왜 무쓸모라고 여기느냐면, 본래 현이라면 할 수 없을 그 임무가 그나마 본인이 자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이라 여김. 결국 현의 전부와도 같던 장군의 긍지를 비롯해서 모든 걸 버리고 임무를 해냈음. 자국에서 돌아오라는 것은 이제는 그 임무가 종결됐다는 것. 그런데 현은 다시 장군이 될 수도 없음. 한마디로 정체성(자아)을 상실해버림...
4.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자의로 안/못 가게 됨.
5. 이런 현실에서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당장 죽어도 미련이 없는 상태의 현을 달래준 건 결국 이러나저러나 위천.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지만 현에게는 그 물이 찰나의 순간이나마 고였던 건 아닐까... 그래서 다시 완전해지지 않았을까...
6. 위천은 현을 위해서라면 뭐든 버릴 수 있었고, 실제로 버렸음.
엄밀히 말하면 현이 위천을 연모한다는 묘사가 확실하게 나오는 건 아님...ㅠㅠ 스스로도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고 어떤 방향으로든 불완전한 형태의 마음이라는 걸 보여줌. 하지만 결국 현이 여생을 함께하기로 한 건 위천이었는데, 나는 위의 과정들이 현의 선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는 것 같다고 여기고 있다.
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.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전장에서의 전술을 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.... 그래서 뒷맛이 쓰다.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서 부디 다들 행복하면 좋겠다.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행복하길...ㅠㅠㅠㅠㅠㅠ